장수사회의 금융, 사회적 안전망으로 진화한다 [2025 아시안 론제비티 포럼] (더버터, 202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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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일요 기자 | 더버터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에서 개최된 ‘2025 아시안 론제비티 포럼(ALF)’ 3부에서는 ‘론제비티와 금융’을 주제로 전문가 4인이 무대에 올랐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한국 사회에서 노후를 위한 금융이 무엇을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전문가들은 연금이나 보험, 신탁과 같은 전통적인 금융 수단의 역할에 더해 조부모경제, 유산기부를 아우르는 새로운 설계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이어졌다. 주제세션 발표에는 강성호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배광열 사단법인 온율 변호사, 조한종 강서50플러스센터장, 하승희 하나리빙트러스트센터 팀장이 차례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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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억 자산가도 홀로 죽는다

두 번째 발표자인 배광열 변호사는 법정 후견과 고령자 권익옹호를 현장에서 다뤄온 변호사다. 그는 ‘금융으로 노년의 고립을 막는다’를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면서 사진 몇 장을 띄웠다. 사진 속 집들은 20억원이 넘는 아파트다. 이곳에 홀로 거주하는 노인의 자산은 50억원으로 추정된다.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노년’이지만, 집 안은 쓰레기로 가득했다. 세탁기 위에는 치우지 못한 대변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고가의 주택을 소유한 자산가지만 결국 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자산 규모만 보면 ‘돈 걱정 없는 노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돌봐줄 사람이 없고, 본인의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순간 이분들의 삶은 급속히 무너집니다. 우리가 노후를 논할 때 공적 복지에서 소외된 ‘중산층 고령자’에 대한 고민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됩니다.”

배 변호사는 서울·수도권의 중산층 고령자들이 고가의 아파트를 여러 채 보유한 채 혼자 살다가,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방치되는 사례를 반복해서 목격했다고 소개했다. 문제는 국가와 지자체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법적·재정적 장치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소득·자산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공공서비스 대상에서 빠집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스스로 도움을 거부하거나 치매에 걸리기라도 하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보유 자산이 오히려 돌봄의 장벽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그가 강조한 해법의 키워드는 ‘준비된 연결고리’다. 연금·보험·신탁·복지 서비스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현재 구조에서는, 당사자의 판단력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연결이 끊어진다. 배 변호사는 “금융상품이 없는 게 아니라, 상품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통로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고령자 재산을 노리는 경제적 착취 문제를 짚었다. “미국에서는 가족·지인·돌봄 제공자가 노인의 자산을 ‘합법을 가장해’ 빼앗는 범죄를 ‘실버 칼라 크라임(Silver collar crimes)’이라고 부릅니다. 노인 학대 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이고 적발이 어려운 범죄로, 일부 주에서는 전담 수사팀까지 운영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미국 증권관리자협회(NASAA)가 만든 ‘취약 성인 보호 모델법’처럼 금융기관 종사자가 고령자 금융착취가 의심될 경우 거래를 잠시 중단하고 감독당국·수사기관에 신고하면 책임을 면제해 주는 장치도 소개했다. 한국에서도 금융소비자보호법·노인복지법 개정을 통해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배 변호사는 최근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치매 공공신탁과 고령자 공공신탁 시범사업 논의도 언급했다. 중산층 이하 고령자의 재산을 공공 신탁에 맡겨 치매·인지저하 이후에도 안전하게 관리하는 제도다. 정부가 내년부터 시범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중산층 고령자를 보호하는 건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국가 복지지출을 줄이는 투자입니다. 자산을 잘 쓰고, 잘 지키도록 도와주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나중에 모든 자산을 잃고 빈곤층으로 떨어진 사람을 지원하는 비용보다 훨씬 적습니다. 금융과 법, 복지가 연결되는 ‘따뜻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장수사회에서 금융이 해야 할 가장 인간적인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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